데르씸(Dersim) 사건
1937년에 데르씸 지역 자자어를 쓰는 부족들이 중앙정부에 반발하며 연합봉기하였고 이에 대해 터키 정부는 강경하게 무력진압을 한 사건을 말한다. 봉기의 주동자는 쎄이드 리자로서 자자어를 쓰는 알레비 였다.
오스만 제국때 아나톨리아 반도 동쪽의 산악지대는 중앙정부의 간섭과 통제에서 벗어나 지역 부족장이나 대지주에 의해서 통제되고 있었다. 아타튀르크의 터키 건국이후 이들은 중앙정부의 간섭에 반대하였고 중앙정부에 세금을 내지 않았다. 1926년 중앙정부에서 파견되어온 지방관리는 내무부장관에게 이 지역이 세금을 내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차례 보고를 올렸고 터키 정부는 신터키공화국 건설을 위해서 걸림돌이 되는 이 산악지역의 토후세력들을 없애기로 결정하고 관련 법령을 만들어 터키화 정책을 펼친다. 1934년 인구재정착 법령을 통과시켰고 1936년은 Dersim 지역(지금의 툰젤리, 엘라즈, 빙굘을 포함하는 지역)의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이름을 Tunceli로 변경하였다.
1927년에는 터키화정책을 위해 아타튀르크의 직속으로 행정,군사,경제 등 지역의 총체적 통제권을 갖는 총독(Umumi Müfettişlikler)제를 관련법안을 통해 신설하여 1928년 터키 동부 지역으로 이들을 파견한다.
1937년 3월 터키군이 데르씸 지역에 있는 우훈두 마을로 들어왔는데 유쑤판(Yusufan) 부족에 속한 메흐멧 알리 멘테쉬가 그 군인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였다. 그런데 군인중 한 젊은 장교가 메흐멧 알리의 젊고 아름다운 부인을 강간하려하자 메흐멧 알리는 명예를 보호하기 위해서 장교와 부인 둘다 총으로 쏴 죽이고 2명의 군사에게 부상을 입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메흐멧 알리와 그 형제들은 마을을 도망쳐 나왔고 군인들의 추격을 지체시킬 목적으로 계곡에 놓여져 있던 Pah 다리의 나무판을 몇장 없애버렸다. 터키 당국은 이 사건을 두고 데르씸 부족들이 반동을 일으켰고 다리를 불태웠다고 밝혔다.
터키군은 Yusufan 부족의 부족장인 카메르 아가(Kamer Aga)를 찾아가 메흐멧 알리의 신변인도를 요청하였다. 만약 그를 넘겨주지 않으면 당신의 마을을 불태워버리겠다고 위협했다. 하지만 케메르 아가는 그 장교가 메흐멧 알리의 부인을 강간하려고 하였기에 일어난 일이기에 그를 넘겨줄 수 없다고 대답했다. 결국 터키군과 데르씸 부족들 사이의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때 쎄이드 리자는 Haydaran, Demenan, Yusufan, Kureyşan 부족등을 규합하여 연합을 이루어 공동대처에 나섰다. 터키 당국의 주장에 의하면 1937년 3월 20일 밤 11시에 데메난과 하이다란 부족민들이 하르칙(Harçik) 계곡에서 Pah와 Kahmut을 잇는 다리를 끊었다고 한다. 툰젤리 총독은 군사작전을 명령하였다. 제2기동부대를 Pülümür에 제3 기동부대를 Pülür에 제9기동부대를 Mazkirt에 다른 기동부대를 Hozat에 그리고 제9기동대의 한 보병소대를 Pah에 출동시켰다.
그해 9월 10일 이 반동의 리더인 세이드 리자가 평화협상을 위해 에르진잔의 한 정부 건물을 찾아갔는데 그 자리에서 동행한 사람들과 함께 체포되었고 다음 날 엘라즈 총독본부로 보내졌고 얼마 후인 1937년 11월 15일-18일 사이에 동행한 다른 6명과 함께 교수형 당했다.
교수형 당한 명단
- Seyit Rıza
- Resik Hüseyin (Seyit Rıza’s son, 16 years old)
- Seyit Hüseyin (the chieftain of Kureyşan-Seyhan tribe)
- Fındık Aga (Yusfanlı Kamer Aga’s son)
- Hasan Aga (Demenan tribe, Cebrail Ağa’s son)
- Hasan (Kureyşan tribesman Ulkiye’s son)
- Ali Aga (Mirza Ali’s son)


